목차
소개
기원
- 1980년대를 위한 신형전차
- 터빈엔진의 선택
-오브옉트 219
T-80B 주력전차
반응장갑 : T-80BV
강력하고 거친 : T-80U
갈림길에 서게 된T-80 : 소련의 붕괴
능동 방어
우크라이나의 T-84
T-80 RpDUFDML WJSCK
-특수화된 T-80계열
FURTHER READING
INTRODUCTION 소개
등가물의 개발
T-80주력전차는 미국의 M1에이브람스,영국의 챌린저 그리고 독일의 레오파드2와 같은 나톤의 신세대전차와 동시대에 배치된 소비에트의 궁극적인 주력전차였다. 새로운 디자인 지향하기보다는 기존의 T-64A전차을 발전적으로 계승했음에도,결과적으로 T-80전차는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현존하는 T-64A와 T-72전차에서 크게 달라진점은 없는 개량형이였지만 강력하지만 연료소모가 심한 가스터빈엔진으로 인해 비싸졌다.
1991년 소련붕괴 이후, 새로운 러시아공화국의 차기전차자리를 놓고 전차공장간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라이벌이던 T-90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오히려 이러한 본국보다 우쿠라이나에서 더나은 대접을 받고있는 형편이다.T-84라는 이름으로 현지화하여 생산되고있다. 그러나 미스테리한 블랙이글이나
다양한 T-80개량형처럼 T-80을 새로운방향을 이끌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으며 적어도 이번 세기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육군의 척추로서 남을것이다.
ORIGINS 기원
냉전시대들어서 처음으로 새롭게 설계된 전차는 T-64계열이였다. 1944년-1955년에서 유래한 T-54디자인을 대체하기 위하여 설계되었다.
T-64는 60년대부터 세기말까지 소련전차설계의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전차디자인은 칼코프 말리셰프 중장비 공장의 설계관료인
알렉산더 모조로프의 발명품이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T-34,T-44그리고 T-54전차를 포함한 전차디자인의 책임을 맡았고 신형전차디자인(T-64)의 작업을 1953년부터 시작했다.
"오브옉트 430"이라고 명명된 신형전차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기존의 T-54전차보다 화력,장갑그리고 기동성에서 더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비슷한 사이즈와 무게를 요구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위하여,오브젝트 430은 완전히 새로운 동력원으로 부터 파워를 받아야만했다.카르모스키 5TD(Charomskiy 5TD)디젤엔진
은 상대적으로 작은크기의 엔진에서 최대의 힘을 발휘하기위해 역 피스톤 배치를 하였다. 또한 신형디자인은 적층식장갑을 포함하는 장갑으로 방어력이 향상되었다.
전차의 크기를 작게하기 위해서,승무원이 세명으로 제한되고,장전수 자동장전장치로 대체되었다. 오브젝트 430은 전통적인 충격흡수용 고무를 포함한 경량의 기동륜이
장착되었다.
최초의 오브옉트 430의 프로토타입은 1959년에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 프로토타입의 100mm D-54TS포가 T-54,55의 D-10T포나 나토의 영국제 L7 105mm포보다 절대적으로 열등해
보인다고 소련육군은 판단했다.오브옉트 430은 D-68 115mm 신형포를 탑재함으로써 오브옉트 432가 되고 1963년 10월부터 카라코프(Kharkov)에서 T-64전차로서 생산되어
1,190대가 1969년까지 생산되었다.
T-64의 생산이 어느정도 제괘도에 이르자. 당연히 그들의 라이벌 나토가 120mm포를 장착한 치프틴처럼 더더욱 강력한전차를 가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비에트가 그에 걸맞는포인
상임(Primary)포병 설계국의 모토빌리카(Motovilika)공장의 설계관료 F.F 페트로프(F.F Petrov)가 172기로 개발한 D-81T Rapira-3 125mm포의 개발을 이끌게 된다.
이 포는 나머지 반세기동안 소비에트 전차의 주요 장비가 될수있었다. 125mm가 장착된 오브옉트 434는 1968 5월T-64A라는 이름으로 생산된다.
T-64A가 등장한 당시에는 굉장히 뛰어난 전차였다.겨우 37T의 무게에 서방의 47T이나 되는 M60A1과 같은 전차와 겨룰만한 화력을 갖추고있었다. 가차없이 사이즈를 잘라낸
T-64A는 M60A1에 비해 대체로 내부용적이 작았다.:11.5m vs 18.4m입방미터.이러한 공간절약은 특히 엔진에서 명백했다.
3.1입방미터에 불과한 크기의 T-64엔진은 7입방미터의 M60과 비교되었다.그러나 강력한 엔진을 그정도 압축시키는것은 큰 도전이였고 더군다나 성공적이지도 않았다.5TD엔진을 장비한 T-64전차의 정비는
악몽에 가까웠고, 굉장히 짧은 정비수명을 (300시간)을 1970년대까지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즈니-타길(Nizhni-Tagil)의 우라바곤(Uralvagom)의 T-64A 편애속에서 공장소비에트육군은 T-62전차의 생산을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설계국은 이후에 결과적으로 T-72가 되는 독자적인 대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설계(T-72)는 T-64A의 '기동화'버전으로 전쟁시 대량생산에서 더싸고 편리하게 생산할수있도록 개발되었다.
T-64A의 기본적인 차체와 포탑을 가지고 있으나 좀더 신중하게 T-34,T-54그리고 T-62로부터 발전된 엔진을 설계했다
더 커진엔진은 엔진의 사이즈를 3.1입방미터에서 4.2입방미터로 증가시켰다.그러나 80마력의 출력만 더 낼뿐이였다.게다가 시험중 서스펜션에 영구적인 손상이 발견되고 더욱더 일반적인
서스펜션이 대체되었다. T-72의 생산은 니즈니-타길에서 1974년에 T-64A대신에 생산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를 위한 신형전차
1971년,소비에트전차산업은 1981년이후 T-64와 T-72를 대체할 신형전차디자인을 작업하기 시작한다.새로운 디자인은 "Perspektivy"라고 불렸으며,정부에서는 "80년에 활동할만한 전차 시험차량"혹은
NST즉 신형중형전차라고 불렸다. 레닌그라드의 설계국은 터빈엔진의 오브옉트225와 디젤엔진의 오브옉트 226을 내놓았다;Chelybinsk는 오브옉트 780을 내놓았다.
둘다 전통적인 포탑에 복합장갑과 Perm에서 개발된 신형 D-85포를 장착하였다;D-85포가 130mm활강포와 122mm강선포 어느것을 쓸지 아직정하지않았었다.
Kharkov는 대안책인 T-72(오브옉트 450)을 상대적으로 늦게 제출했다.T-74는 위 세가지의 안중 가장 혁신적인 형태였다. T-74는 승무원이 모두 차체에 탑승하고 승무원 머리위에 포를 장착하였다.
몇년동안, 이 세개의 설계국은 자신들의 개발품을 손질했다.레닌그라드계획은 오브옉트 258로 발전하였고 Chelyabinsk의 것은 오브옉트 450으로 발전하였다.세개의 설계국중 오직 Kharkov만이 열정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있었다. 레닌그라드는 가스터빈인 T-64전차에 관심을 돌렸고,Chelyabinsk는 점진적으로 원로임원의 교체에 따라 전차사업에서 멀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T-74전차에 대해서는
열정적이였다,T-64에서 대실패를 겪은 소비에트육군의 회의적이였고,T-64의 아버지 모조로프는 은퇴에 길로에 있었다.
가스터빈을 선택하기까지
이미 1950년대부터 전차에 가스터빈엔진을 쓰는것이 주목받아왔다. 가스터빈엔진 기술자들 제트엔진기술자였지만,추진을 위해 제트엔진에 의존하기보다는,엔진에서
나온 에너지가 트랜스미션을 경유하여 회전에너지로 전환되는 방식을 사용했다. 헬리콥터의 추진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가스터빈엔진은 군이 잠재적으로 전차에도 이러한 엔진을 적용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
가 되었다. 군의 주요한관심사는 가스터빈의 상대적인 사이즈에서 나오는 높은 출력이였다.
가스터빈엔진 전차의 조사는 1956년부터 시작했다,그러나 1960년대초의 몇몇 실험적인 시도는 가스터빈에 대한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하였다.
빠른속도를 자랑했지만, 가스터빈엔진의 연료를 매우 격렬하게 소모했다.평균적으로 디젤엔진이 시간단 8kg의 연료를 소모할때 가스터빈엔진은
240kg을 시간당 소비했던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헬리콥터가 운영되던 공중에 비해 지상의 환경이 명백히 전차엔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것이다,
현존하는 에어필터는 적합하지않았다. 가스터빈엔진이 작동하면 디젤엔진보다 더많은 공기를 흡입한다.이로인해 흡입되는 먼지는 몇몇내부 부품의 부식이나 피해를 입
히게한다.
1960년대,나키타 후루시초프는 중전차 프로그램이 대전차미사일의 시대에 더이상 전망이 없다는 이유로 종료할것을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은,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LKZ)과 Chelyabinsk전차공장이 많은수의 인력과 산업자원을 사용할수게
되고, 레닌그라드가 가스터빈엔진전차생산의 중추핵이 되게했다.Zhozef Kotin이란 전쟁중 Chelyabinsk에서 중전차디자인을 맡은 장군은 러시아수송산업과학연구기구(VNII Transmash)의 수장으로 재임명 되었다.
이 기구는 레닌그라드의 전차산업 연구의 주요기관이었다.
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LKZ)공장은 N. S. 포포프가 맡은 제3설계국(Konstruktorskoye biuro-3:KB-3)과 연관되있었다.이 설계국은 T-64생산을 위한 준비를 명령했다.마찬가지로 운용중 안정성에 문제많은 T-64A로 인해 5TD엔진을 꺼리던
니즈니-타길 또한 잠재적으로 가스터빈엔진을 어떠한 레닌그라드의 T-64에 적용하는것도 관심을 가졌다. 프로젝트의 중요한 요인은 가스터빈엔진을 전차에 쓰는데 낙관적이던
Klimov Research-Production Association(NPO)의 S. P. Izotov의 관료들이 임명된것이다. 전차에 대한 작업은 브레즈네브 정권 당시 크레믈린에서 레닌그라드를 대표하던 G.V 로마노프가 임명되면서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프로그램은 1968년 5월 16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Izotov는 전차의 가스터빈엔진이 단순히 기존의 헬리콥터에서 기반하지 말아야한다고 결정했다. 전차엔진은 대게 거친도로로 인하여 높은 충격 흡수해야하고 (추가),게다가 육군은 공기정화장치,변속기,콤프레셔,연료펌프그리고 엔진추진기가 제거되고 하나의
단일화된 모듈이되길 요구했다. 이러하여 새로운 GTD-1000T엔진은 1969년 4월에 Kaluga엔진공장에서 처음으로 전차차대에 장착이되었다. 그리고 1970년부터 Kaluga엔진공장에서 양산형디자인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으브옉트 219
최초의 GTD-1000T 가스터빈엔진은 오브옉트219라는 변형된 T-64전차차대에 장착되고,후에 Groza(천둥)이라는 명칭이라고도 불린다. 초창기의 시도는 Izotov 에게 불평을 받았는데
T-64의 강철제 전륜이 강한 진동에서가스터빈의 잠재적인 속도를 제한했기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오브옉트 219를 위한 새로운 서스펜션 시스템을 개발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라이벌이던 니즈니-타길(역주 현재 T-90을 생산하는 그 공장 맞습니다.)의 T-72의 서스펜션과 어떠한 표준화를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서스펜션을 장착한 오브옉트 219 sp.2 1971년에 완료되었다.1968년부터 1971년까지 60명의 전차병들이 다양한 서스펜션과 보조 구성품의 조합을 시험했다. 그러나 먼지흡입이 문제가 되었고, 이에 사이드스커트에 고무면을 구성하고 엔진의 정화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하게했다.
일반적으로,1973년 당시의 시도를 살펴보면 가스터빈엔진의 전차기동성향상으로서 잠재력은 T-64를 뛰어넘었지만,500시간의 목표수명을 달성하는데에는 실패했다.
1972년 후반, 오직 27개생산되 엔진 중 19개의 엔진만이 300시간의 수명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1974년부터 1975년간의 볼가강 군관구의 군단급 테스트에서는 연료소비가 극심하고 엔진은 신뢰성이 여전히 절망적이였다. 전차는 거대한 외부연료탱크가 필요했도 450km를 기동하는데에는 기본적인 요구조건이였다. 연료소비는 최신형이던 오브옉트 219 sp.8 조차 1.6~1.8배정도 T-64A형에 비해 높았다.
소련의 전차산업은 그들의 생산계획의 뒤에 있었다.,특히 T-64A와T-72의 생산이 이러한 문제에 큰역할을 담당했고,또한 1973년 욤키퍼전쟁에서 충격적으로 높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차손실로 인한 T-64와 T-55전차를 동시에 생산해서 수출해야하는것도 문제였다. 국방장관이던 안드레이 그레코원수는 오브옉트219가 T-64A에 비해 두배나 되는 연료를 집어먹으면서 화력이나 방어력에서 진전이 없다는 이유로 배치되는것을 각하하였다.
오브옉트 219는 이렇게 또하나의 실험적인 실패작으로 남을것처럼 보였다.그러나 1976년 4월 그레코가 사망하고 드미트리 유지노프(Dmitry Ustinov)가 임명되자 오브옉트 219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드미트리 유지노프는 소비에트의 군대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이였다.야전사령군출신이 아니고 2차대전당시 방위산업의 우두머리였고 1960년대 부터 가스터빈엔진을 전차에 적용하는데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브옉트 219는 그가 가장 아끼는 프로젝트였다. 결과적으로, 1976년 9월 6일, 오브옉트 219는 갑작스럽게 T-80이라는 명친으로 생산하는것이 허가되었다.현재에도 나타나는 초창기의 문제점들은 전차가 연속적으로배치되기 위해 무시해버렸다.LKZ에서 T-80이라고 불리는 계획으로 위해 T-64A가 대체되었고 옴스크 공장NO.13D을 T-55생산에서 T-72생산으로 변환하는 계획도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대체에도 옴스크공장도 T-80계획을 할당받게되었다. 결국 유스티브는 KHARKOV 공장이 최종적으로 T-64전차 생산에서 T-80생산을 맏도록하는 것도 계획했다.유지노프는 경제적인 Ural공장의 T-72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T-54같은 구형전차를 대체하는 경제적인 필요성과 전쟁에서 값싼 기동구성으로서 써먹는 필요성을 인지했다.그러나 유지노프는 혁신에서의 우선권은 T-80이였고 T-72는 아니였다. 이러한 생산결정은 1976년에 결정되었고, T-64의 아버지인 모조로프또한 이때 은퇴하였다.이러한 상황이 T-80의 편애속에서 T-74NST 계획이 파기되게 하였다.
수정완료
소개
기원
- 1980년대를 위한 신형전차
- 터빈엔진의 선택
-오브옉트 219
T-80B 주력전차
반응장갑 : T-80BV
강력하고 거친 : T-80U
갈림길에 서게 된T-80 : 소련의 붕괴
능동 방어
우크라이나의 T-84
T-80 RpDUFDML WJSCK
-특수화된 T-80계열
FURTHER READING
INTRODUCTION 소개
등가물의 개발
T-80주력전차는 미국의 M1에이브람스,영국의 챌린저 그리고 독일의 레오파드2와 같은 나톤의 신세대전차와 동시대에 배치된 소비에트의 궁극적인 주력전차였다. 새로운 디자인 지향하기보다는 기존의 T-64A전차을 발전적으로 계승했음에도,결과적으로 T-80전차는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현존하는 T-64A와 T-72전차에서 크게 달라진점은 없는 개량형이였지만 강력하지만 연료소모가 심한 가스터빈엔진으로 인해 비싸졌다.
1991년 소련붕괴 이후, 새로운 러시아공화국의 차기전차자리를 놓고 전차공장간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라이벌이던 T-90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오히려 이러한 본국보다 우쿠라이나에서 더나은 대접을 받고있는 형편이다.T-84라는 이름으로 현지화하여 생산되고있다. 그러나 미스테리한 블랙이글이나
다양한 T-80개량형처럼 T-80을 새로운방향을 이끌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으며 적어도 이번 세기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육군의 척추로서 남을것이다.
ORIGINS 기원
냉전시대들어서 처음으로 새롭게 설계된 전차는 T-64계열이였다. 1944년-1955년에서 유래한 T-54디자인을 대체하기 위하여 설계되었다.
T-64는 60년대부터 세기말까지 소련전차설계의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전차디자인은 칼코프 말리셰프 중장비 공장의 설계관료인
알렉산더 모조로프의 발명품이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T-34,T-44그리고 T-54전차를 포함한 전차디자인의 책임을 맡았고 신형전차디자인(T-64)의 작업을 1953년부터 시작했다.
"오브옉트 430"이라고 명명된 신형전차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기존의 T-54전차보다 화력,장갑그리고 기동성에서 더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비슷한 사이즈와 무게를 요구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위하여,오브젝트 430은 완전히 새로운 동력원으로 부터 파워를 받아야만했다.카르모스키 5TD(Charomskiy 5TD)디젤엔진
은 상대적으로 작은크기의 엔진에서 최대의 힘을 발휘하기위해 역 피스톤 배치를 하였다. 또한 신형디자인은 적층식장갑을 포함하는 장갑으로 방어력이 향상되었다.
전차의 크기를 작게하기 위해서,승무원이 세명으로 제한되고,장전수 자동장전장치로 대체되었다. 오브젝트 430은 전통적인 충격흡수용 고무를 포함한 경량의 기동륜이
장착되었다.
최초의 오브옉트 430의 프로토타입은 1959년에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 프로토타입의 100mm D-54TS포가 T-54,55의 D-10T포나 나토의 영국제 L7 105mm포보다 절대적으로 열등해
보인다고 소련육군은 판단했다.오브옉트 430은 D-68 115mm 신형포를 탑재함으로써 오브옉트 432가 되고 1963년 10월부터 카라코프(Kharkov)에서 T-64전차로서 생산되어
1,190대가 1969년까지 생산되었다.
T-64의 생산이 어느정도 제괘도에 이르자. 당연히 그들의 라이벌 나토가 120mm포를 장착한 치프틴처럼 더더욱 강력한전차를 가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비에트가 그에 걸맞는포인
상임(Primary)포병 설계국의 모토빌리카(Motovilika)공장의 설계관료 F.F 페트로프(F.F Petrov)가 172기로 개발한 D-81T Rapira-3 125mm포의 개발을 이끌게 된다.
이 포는 나머지 반세기동안 소비에트 전차의 주요 장비가 될수있었다. 125mm가 장착된 오브옉트 434는 1968 5월T-64A라는 이름으로 생산된다.
T-64A가 등장한 당시에는 굉장히 뛰어난 전차였다.겨우 37T의 무게에 서방의 47T이나 되는 M60A1과 같은 전차와 겨룰만한 화력을 갖추고있었다. 가차없이 사이즈를 잘라낸
T-64A는 M60A1에 비해 대체로 내부용적이 작았다.:11.5m vs 18.4m입방미터.이러한 공간절약은 특히 엔진에서 명백했다.
3.1입방미터에 불과한 크기의 T-64엔진은 7입방미터의 M60과 비교되었다.그러나 강력한 엔진을 그정도 압축시키는것은 큰 도전이였고 더군다나 성공적이지도 않았다.5TD엔진을 장비한 T-64전차의 정비는
악몽에 가까웠고, 굉장히 짧은 정비수명을 (300시간)을 1970년대까지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즈니-타길(Nizhni-Tagil)의 우라바곤(Uralvagom)의 T-64A 편애속에서 공장소비에트육군은 T-62전차의 생산을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설계국은 이후에 결과적으로 T-72가 되는 독자적인 대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설계(T-72)는 T-64A의 '기동화'버전으로 전쟁시 대량생산에서 더싸고 편리하게 생산할수있도록 개발되었다.
T-64A의 기본적인 차체와 포탑을 가지고 있으나 좀더 신중하게 T-34,T-54그리고 T-62로부터 발전된 엔진을 설계했다
더 커진엔진은 엔진의 사이즈를 3.1입방미터에서 4.2입방미터로 증가시켰다.그러나 80마력의 출력만 더 낼뿐이였다.게다가 시험중 서스펜션에 영구적인 손상이 발견되고 더욱더 일반적인
서스펜션이 대체되었다. T-72의 생산은 니즈니-타길에서 1974년에 T-64A대신에 생산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를 위한 신형전차
1971년,소비에트전차산업은 1981년이후 T-64와 T-72를 대체할 신형전차디자인을 작업하기 시작한다.새로운 디자인은 "Perspektivy"라고 불렸으며,정부에서는 "80년에 활동할만한 전차 시험차량"혹은
NST즉 신형중형전차라고 불렸다. 레닌그라드의 설계국은 터빈엔진의 오브옉트225와 디젤엔진의 오브옉트 226을 내놓았다;Chelybinsk는 오브옉트 780을 내놓았다.
둘다 전통적인 포탑에 복합장갑과 Perm에서 개발된 신형 D-85포를 장착하였다;D-85포가 130mm활강포와 122mm강선포 어느것을 쓸지 아직정하지않았었다.
Kharkov는 대안책인 T-72(오브옉트 450)을 상대적으로 늦게 제출했다.T-74는 위 세가지의 안중 가장 혁신적인 형태였다. T-74는 승무원이 모두 차체에 탑승하고 승무원 머리위에 포를 장착하였다.
몇년동안, 이 세개의 설계국은 자신들의 개발품을 손질했다.레닌그라드계획은 오브옉트 258로 발전하였고 Chelyabinsk의 것은 오브옉트 450으로 발전하였다.세개의 설계국중 오직 Kharkov만이 열정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있었다. 레닌그라드는 가스터빈인 T-64전차에 관심을 돌렸고,Chelyabinsk는 점진적으로 원로임원의 교체에 따라 전차사업에서 멀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T-74전차에 대해서는
열정적이였다,T-64에서 대실패를 겪은 소비에트육군의 회의적이였고,T-64의 아버지 모조로프는 은퇴에 길로에 있었다.
가스터빈을 선택하기까지
이미 1950년대부터 전차에 가스터빈엔진을 쓰는것이 주목받아왔다. 가스터빈엔진 기술자들 제트엔진기술자였지만,추진을 위해 제트엔진에 의존하기보다는,엔진에서
나온 에너지가 트랜스미션을 경유하여 회전에너지로 전환되는 방식을 사용했다. 헬리콥터의 추진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가스터빈엔진은 군이 잠재적으로 전차에도 이러한 엔진을 적용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
가 되었다. 군의 주요한관심사는 가스터빈의 상대적인 사이즈에서 나오는 높은 출력이였다.
가스터빈엔진 전차의 조사는 1956년부터 시작했다,그러나 1960년대초의 몇몇 실험적인 시도는 가스터빈에 대한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하였다.
빠른속도를 자랑했지만, 가스터빈엔진의 연료를 매우 격렬하게 소모했다.평균적으로 디젤엔진이 시간단 8kg의 연료를 소모할때 가스터빈엔진은
240kg을 시간당 소비했던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헬리콥터가 운영되던 공중에 비해 지상의 환경이 명백히 전차엔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것이다,
현존하는 에어필터는 적합하지않았다. 가스터빈엔진이 작동하면 디젤엔진보다 더많은 공기를 흡입한다.이로인해 흡입되는 먼지는 몇몇내부 부품의 부식이나 피해를 입
히게한다.
1960년대,나키타 후루시초프는 중전차 프로그램이 대전차미사일의 시대에 더이상 전망이 없다는 이유로 종료할것을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은,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LKZ)과 Chelyabinsk전차공장이 많은수의 인력과 산업자원을 사용할수게
되고, 레닌그라드가 가스터빈엔진전차생산의 중추핵이 되게했다.Zhozef Kotin이란 전쟁중 Chelyabinsk에서 중전차디자인을 맡은 장군은 러시아수송산업과학연구기구(VNII Transmash)의 수장으로 재임명 되었다.
이 기구는 레닌그라드의 전차산업 연구의 주요기관이었다.
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LKZ)공장은 N. S. 포포프가 맡은 제3설계국(Konstruktorskoye biuro-3:KB-3)과 연관되있었다.이 설계국은 T-64생산을 위한 준비를 명령했다.마찬가지로 운용중 안정성에 문제많은 T-64A로 인해 5TD엔진을 꺼리던
니즈니-타길 또한 잠재적으로 가스터빈엔진을 어떠한 레닌그라드의 T-64에 적용하는것도 관심을 가졌다. 프로젝트의 중요한 요인은 가스터빈엔진을 전차에 쓰는데 낙관적이던
Klimov Research-Production Association(NPO)의 S. P. Izotov의 관료들이 임명된것이다. 전차에 대한 작업은 브레즈네브 정권 당시 크레믈린에서 레닌그라드를 대표하던 G.V 로마노프가 임명되면서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
프로그램은 1968년 5월 16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Izotov는 전차의 가스터빈엔진이 단순히 기존의 헬리콥터에서 기반하지 말아야한다고 결정했다. 전차엔진은 대게 거친도로로 인하여 높은 충격 흡수해야하고 (추가),게다가 육군은 공기정화장치,변속기,콤프레셔,연료펌프그리고 엔진추진기가 제거되고 하나의
단일화된 모듈이되길 요구했다. 이러하여 새로운 GTD-1000T엔진은 1969년 4월에 Kaluga엔진공장에서 처음으로 전차차대에 장착이되었다. 그리고 1970년부터 Kaluga엔진공장에서 양산형디자인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으브옉트 219
최초의 GTD-1000T 가스터빈엔진은 오브옉트219라는 변형된 T-64전차차대에 장착되고,후에 Groza(천둥)이라는 명칭이라고도 불린다. 초창기의 시도는 Izotov 에게 불평을 받았는데
T-64의 강철제 전륜이 강한 진동에서가스터빈의 잠재적인 속도를 제한했기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오브옉트 219를 위한 새로운 서스펜션 시스템을 개발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라이벌이던 니즈니-타길(역주 현재 T-90을 생산하는 그 공장 맞습니다.)의 T-72의 서스펜션과 어떠한 표준화를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서스펜션을 장착한 오브옉트 219 sp.2 1971년에 완료되었다.1968년부터 1971년까지 60명의 전차병들이 다양한 서스펜션과 보조 구성품의 조합을 시험했다. 그러나 먼지흡입이 문제가 되었고, 이에 사이드스커트에 고무면을 구성하고 엔진의 정화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하게했다.
일반적으로,1973년 당시의 시도를 살펴보면 가스터빈엔진의 전차기동성향상으로서 잠재력은 T-64를 뛰어넘었지만,500시간의 목표수명을 달성하는데에는 실패했다.
1972년 후반, 오직 27개생산되 엔진 중 19개의 엔진만이 300시간의 수명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1974년부터 1975년간의 볼가강 군관구의 군단급 테스트에서는 연료소비가 극심하고 엔진은 신뢰성이 여전히 절망적이였다. 전차는 거대한 외부연료탱크가 필요했도 450km를 기동하는데에는 기본적인 요구조건이였다. 연료소비는 최신형이던 오브옉트 219 sp.8 조차 1.6~1.8배정도 T-64A형에 비해 높았다.
소련의 전차산업은 그들의 생산계획의 뒤에 있었다.,특히 T-64A와T-72의 생산이 이러한 문제에 큰역할을 담당했고,또한 1973년 욤키퍼전쟁에서 충격적으로 높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차손실로 인한 T-64와 T-55전차를 동시에 생산해서 수출해야하는것도 문제였다. 국방장관이던 안드레이 그레코원수는 오브옉트219가 T-64A에 비해 두배나 되는 연료를 집어먹으면서 화력이나 방어력에서 진전이 없다는 이유로 배치되는것을 각하하였다.
오브옉트 219는 이렇게 또하나의 실험적인 실패작으로 남을것처럼 보였다.그러나 1976년 4월 그레코가 사망하고 드미트리 유지노프(Dmitry Ustinov)가 임명되자 오브옉트 219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드미트리 유지노프는 소비에트의 군대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이였다.야전사령군출신이 아니고 2차대전당시 방위산업의 우두머리였고 1960년대 부터 가스터빈엔진을 전차에 적용하는데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브옉트 219는 그가 가장 아끼는 프로젝트였다. 결과적으로, 1976년 9월 6일, 오브옉트 219는 갑작스럽게 T-80이라는 명친으로 생산하는것이 허가되었다.현재에도 나타나는 초창기의 문제점들은 전차가 연속적으로배치되기 위해 무시해버렸다.LKZ에서 T-80이라고 불리는 계획으로 위해 T-64A가 대체되었고 옴스크 공장NO.13D을 T-55생산에서 T-72생산으로 변환하는 계획도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대체에도 옴스크공장도 T-80계획을 할당받게되었다. 결국 유스티브는 KHARKOV 공장이 최종적으로 T-64전차 생산에서 T-80생산을 맏도록하는 것도 계획했다.유지노프는 경제적인 Ural공장의 T-72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T-54같은 구형전차를 대체하는 경제적인 필요성과 전쟁에서 값싼 기동구성으로서 써먹는 필요성을 인지했다.그러나 유지노프는 혁신에서의 우선권은 T-80이였고 T-72는 아니였다. 이러한 생산결정은 1976년에 결정되었고, T-64의 아버지인 모조로프또한 이때 은퇴하였다.이러한 상황이 T-80의 편애속에서 T-74NST 계획이 파기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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